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로다 요시타카 (문단 편집) === 재등장과 말년 ===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립하면서 전운이 감돌자 간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사재를 죄다 털어내는 등 재화를 쏟아부어 영지 부젠국과 그 인근에서 재빨리 농민과 낭인을 모집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규슈 평정에 나선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참전을 위해 영지를 비운 주변 다이묘들의 영지를 간단히 병합하는 등 전광석화 같은 솜씨로 연전연승하여 규슈 최남단의 시마즈 가 등을 비롯하여 그와 뜻을 같이할(혹은 빠르게 토벌하기 껄끄러운) 무력 집단을 제외하고 규슈를 거진 평정한다.[* 규슈3강 중 북동부에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해왔던 오토모는 1577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시마즈군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세력이 급속히 쇠퇴했으며, [[임진왜란]]에서의 실책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분고 1국마저 개역당했다. 히젠 류조지의 실권은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당주인 류조지 다카노부가 전사한 이후, 겉으로는 서군이지만 속내는 동군이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오토모, 류조지를 차례로 격파하고 큐슈 통일을 눈 앞에 뒀던 시마즈는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군에게 항복. 그 댓가로 사츠마, 오스미, 휴가 3국을 받게되었으나,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린 심정인 당주 요시히사의 마음에 찰리가 없었다. 결국 시마즈 가문은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강제적으로 은거하게된 요시히사와 당주로 임명된 요시히로 사이의 반목으로 거의 내분직전이었다. 이 때문에 구로다를 가로막을 만한 세력은 없는거나 마찬가지.] 그 의도는 그가 직접 말한 바 없어 공식적으로는 수수께끼이나,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나 당시 사람들의 인식 모두 그가 형세를 보아 천하를 다투려 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해 있다. 도쿠가와와 이시다가 서로 싸우고 있을때 규슈 전역을 평정한 다음 재빨리 출병하여 교토에 있는 덴노나 오사카에 있는 히데요리를 확보한다면 대의명분을 잡을 수 있었다.[* 잘하면 천하를 차지하고 못해도 도요토미, 도쿠가와에 이은 제 3의 세력으로 급부상 할 수 있다.] 구로다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최종적으로 동군의 승리로 끝나면서도 그 과정에는 서군이 잘 막아내어 도쿠가와가 겨우겨우 힘겹게 이겨 전투가 끝난 뒤에는 지쳐있는 시나리오를 바랐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세키가하라의 결전이 싱거울 정도로 빨리 끝나면서 그의 의도가 어쨌거나 일본 천하는 재빠르게 이에야스의 지배 체제 굳히기로 사실상 들어갔다. 그러자 간베에는 평생 보여준 지략에 못지 않은 처세술을 발휘, 미련없이 지금까지의 규슈 토벌이 모두 이에야스를 위해 행동한 것처럼 포장한다. 실제로도 복속시킨 규슈의 영지들을 이에야스에게 깔끔하게 모두 헌납했으며 그의 이런 처세술 덕분에 그는 물론 가문을 계승한 나가마사 역시도 일신의 안위와 함께 가문을 지킬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죽을 때까지 도요토미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렇게 처세술을 발휘하고 재빨리 은퇴, 타이밍 맞춰 죽어주지 않았다면 막부의 숙청 대상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아들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동군으로 참여한 친 도쿠가와였으므로 요시타카만 아니면 큰 문제가 될 일이 없었다.] 비슷하게 죽는 순간까지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으면서 타이밍 맞춰 죽은 [[가토 기요마사]]가 구로다 요시타카와 달리 본인 사후에 자기 가문이 [[가이에키]]로 인해 다이묘직 계승권을 박탈당한 것을 감안하면, 구로다 가문은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일을 마친 후에는 은퇴했고, [[교토]] 후시미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항년 57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